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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조 : 홍은열

홍통사 2008. 12. 21. 09:44
시조(始祖) : 홍은열(洪殷悅)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광익경제공신(匡翊經濟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로 전하는 은열(殷悅)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선계(先系)는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 : 27대 왕, 재위기간:618∼642)이 덕예 문학의 선비를 뽑아 보내 달라는 사신(使臣)을 보내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여덟 명의 학사(學士)를 문화사절(文化使節)로 고구려에 파견할 때 그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온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으로 전한다. 천하(天河)는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했으며,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유학(儒學) 발전에 공(功)을 세워 문무왕(文武王) 때 당성(唐城 : 남양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지고, 신무왕(神武王)이 태자 태사(太子太師)로 추대했으며 효소왕(孝昭王)은 당성후(唐城候)를 삼았다고 한다. 그후 당성(唐城)의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은열(殷悅)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십대명벌(十代名閥)」로 손꼽혔다. 남양홍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시조로 모셔 두고 그의 10대손(족보의 기록)인 고려(高麗) 개국(開國) 공신 홍은열(洪殷悅)[초명 유(儒)]을 시조로 그로부터 세계를 헤아려 온다. 그의 손자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파[예사공파(禮史公派)], 6세손대 때 1파[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세손대 에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조로 나뉘는데 그중에도 맏이인 남양군(南陽君)[홍주(洪澍)]파와 문정공(文正公)[홍언박(洪彦博)]파가 남양홍 전체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도 많고 융성을 누렸다. 그밖에 판중추(判中樞)[홍언수(洪彦修)파]·익산군(益山君)[홍운수(洪云遂)파]·예사공(禮史公)[홍복파] 중랑공(中郞公)[홍후(洪厚)파]가 버금가는 세력을 차지, 이들 6파가 남양홍 위세의 주력인 셈. 특히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선조조 한성우윤(宣祖朝 漢城右尹)]의 자손에서만 상신(相臣) 5명과 문형(文衡)[大提學] 2명, 왕비(王妃) 1명, 20여 명의 판서(判書)급을 배출하는 화려한 가통을 이루었다. 석벽은 천민(天民)[선조조 도승지(宣祖朝 都承旨)]· 일민(逸民)[현감(縣監)]· 성민(聖民)[대제학 참찬(大提學 參贊)]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민의 후손에서 4명의 정승이 나왔다. 홍씨의 본관(本貫)및 시조(始祖) ♤남양 홍씨·(南陽洪氏)  일세조 휘(諱): 은 열(殷 悅), 삼중대광(三重大匡) ♤남양 홍씨·토홍계(南陽洪氏·土洪系)  시 조 휘(諱): 선 행(先 幸),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 ♤풍산 홍씨(豊山洪氏)  시 조 휘(諱): 지 경(之 慶), 국학직학(國學直學) ♤홍주 홍씨(洪州洪氏)  시 조 휘(諱): 규(規),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출처 : 남양홍씨종친회
글쓴이 : 홍한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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