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 공부방

하동사후(河東獅吼) / 사자성어 공부(75)

홍통사 2017. 6. 7. 18:11


사자성어(四字成語) 공부 75일차






(1) 하동사후(河東獅吼)      물 하, 동녁 동, 사자 사, 울부짖을 후


     하동 땅에 사자가 울부짖다는 말로 사나운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하동사자후(河東獅子吼)라고도 한다. 진조는 자가 계상(季常)이며, 황주(黃州)의 기정(岐亭)에서 살면서 스스로 용구선생(龍丘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소동파가 황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에 진조와 자주 어울려 한담을 나누며 즐겁게 놀았다.


진조는 손님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각 방면의 벗들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고는 날이 밝을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유씨(柳氏)는 사나운 성격에 질투가 심하여 남편이 그처럼 밤을 새며 노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모두들 한껏 흥이 고조되어 있을 때 옆방에서 성난 사자가 울부짖는 것처럼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진조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 벌벌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소동파가 이를 두고 〈기오덕인겸간진계상(寄吳德仁兼簡陳季常)〉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용구거사는 불쌍도 하여라, 공담을 이야기하며 밤을 지새우는데, 문득 하동의 사자가 울부짖으니, 지팡이 떨어뜨리고 넋을 잃누나"라는 내용으로, 장난 삼아 진조를 놀려 준 것이다.


이 고사는 송()나라 때 홍매(洪邁)가 지은 《용재삼필(容齋三筆)》 등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하동사후는 성질이 사나운 여자, 특히 표독한 아내나 악처(惡妻)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동사후 [河東獅吼] (두산백과)






(2) 자두연기(煮荳燃箕)     삶을 자, 콩 두, 탈 연, 콩깍지 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는 말로 형제간의 아귀다툼을 일컫는 말이다.




삼국 시대의 영웅 조조(曹操)에게는 아들이 여럿이었지만, 그는 자기 뒤를 이을 자식으로 첫째 비()와 셋째 식()을 꼽고 있었다. 조비는 성격이 활달하고 무에 능하여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빈 반면, 조식은 천부적 자질의 시인이었다. 난세에 절대 필요한 무를 갖춘 데다 장남인 탓으로 조비가 객관적 관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조는 오히려 자기의 문학적 자질을 빼어 닮은 셋째를 더 사랑했다.

그런 까닭으로 조비의 마음 속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우 조식에 대한 경계심과 미움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런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는 조식은 조식대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윽고 조조가 죽은 후 그 자리는 조비에게 돌아감으로써 계승권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그렇다고 조비의 가슴 속 앙금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우가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썼다. 한번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조식에게 이런 엄포를 놓았다.

“과인의 앞에서 일곱 걸음을 걷되, 그동안에 시를 한 편 지어 읊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중한 벌을 내릴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심술이 아니라 천하제일의 문재(文才)라고 칭찬이 자자한 아우에게 일침을 가하여 창피를 주려는 술책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조식은 일곱 걸음을 걸은 후 목청을 가다듬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것이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콩 삶는 데 콩깍지를 때니’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은 솥 안에서 우는구나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났거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서로 지짐이 어찌 이리 급하뇨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가 같은 부모형제 사이에도 싸우는 인간의 동물성을 잘 표현한 시이다. 듣고 있던 조비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감상으로 조비의 비정함은 그 후로도 변함이 없었고, 조식은 계속 불우한 처지에 있다가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두연기 [煮豆燃萁] (고사성어 따라잡기, 2002. 5. 15., (주)신원문화사)






(3) 태사지간(太史之簡)     클 태, 역사 사, 갈 지, 대쪽 간


     큰 역사를 쓸려면 대쪽같은 성정을 갖고 가야한다는 말이다.




태사(太史)는 중국에서 기록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로 사관(史官)을 말하고, 간()은 문서를 말함. 즉, 역사가(歷史家)의 역사(歷史) 기록. 역사(歷史)를 기록함에 사실(事實)을 숨기지 아니하고 그대로 직필(直筆)함






(4) 선양방벌(禪讓放伐)     선 선, 사양할 양, 놓을 방, 칠 벌


    중국 역성혁명(왕조를 바꾸는 혁명)의 규범적인 두 가지 방식



유가(儒家)에서 전승한 고대사에 의하면, 제요(帝堯)는 민간의 효자 순()을 사위로 삼고, 불초한 아들인 단주(丹朱)를 제쳐 놓고 유덕(有德)하며 천명(天命)을 받아야 할 순에게 자발적으로 양위(讓位)하였다. 제순(帝舜)도 마찬가지로 우()에게 천하를 물려주었으나, 우의 아들 계()는 하왕조(夏王朝)를 세습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걸()에 이르자, 탕()은 무도한 군주인 그를 무력으로 방벌(放伐)하여 은왕조(殷王朝)를 일으켰다. 은의 주왕(紂王)도 역시 폭군이어서 주()의 무왕(武王)은 아버지인 문왕(文王)의 업()을 이어 은을 멸망시키는 것은 천명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맹자(孟子)는 탕무(湯武)의 무력혁명인 방벌과 요순(堯舜)의 선양을 시인하였다. 그후 역사상의 혁명은 야심과 실력으로 수행되었으나, 한족(漢族) 또는 한화(漢化)한 북적(北狄)간의 왕조교체는 선양의 형식으로 위()의 조비(曹丕)에서 송()의 태조(太祖)까지 중세에 10여 회 행하여졌다. 선양의 관념은 멀리는 왕망(王莽)의 찬탈에 있었고, 가까이는 청()의 선통제(宣統帝) 퇴위조(退位詔)인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말에도 있다. 번거로운 의식(儀式)과 신비적인 이론의 뒷받침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송 이후의 종족간의 흥망과는 달리 민중까지 휘말리는 대규모 유혈을 피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양방벌 [禪讓放伐] (두산백과)